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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대 초기(Modern)_9

by HI_S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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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기독교와 기독교 세계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기독교는 루터교, 츠벤리안교, 칼뱅교를 포함한 다양한 교회 개혁 운동을 거쳤으며, 그 후 반개혁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12.6 십자군의 종식과 통일

후스 십자군은 얀 후스보헤미아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다루며, 그로트니키 전투로 끝났습니다. 후스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제1차 유럽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약 무기를 사용한 총과 같은 결정적인 기여가 있었습니다.

 

후스 전사들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중장갑 기사를 거느린 대형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보병혁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호세 십자군 정세는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1456년 마지막 십자군은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베오그라드 포위를 풀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이 십자군은 요한 후냐디와 조반니 다 카피스트라노가 주도했습니다. 포위는 결국 큰 전투로 치닫았고, 그 사이 후냐디는 기습적인 반격을 통해 터키 캠프를 점령했습니다.

 

결국 부상당한 술탄 무함마드 2세는 포위를 풀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베오그라드 포위는 기독교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교황 칼리스토 3세가 명령한 정오 시계는 기독교 세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거의 100년 후,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교회 아래 뭉칠 수 있다는 생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은 기독교의 종교적, 정치적, 지리적 구분을 확립했습니다.

 

이 원칙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1648년에 법적으로 단일 기독교 패권 개념인 하나, 신성, 신성, 신성의 개념을 종료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신앙을 실천할 권리를 갖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교전쟁이 끝나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주권민족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이후 기독교 코퍼스는 많은 다른 커뮤니티로 구성된 관대하고 다양한 사회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12.7 러시아 차르(최고 통치자)

제3로마 사상의 발달로 대공 이반 4세는 1547년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첫 차르(카이사르)로 즉위했습니다. 차르는 새로운 법전(1550년)을 공포하고 최초의 러시아 봉건 대표 기관(젬스키 소보르)을 설립했습니다. 지방 자치를 농촌 지역에 도입했습니다.

 

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이반 4세는 3개의 타타르 칸국 (분단된 금장 칸국의 일부)을 병합하여 이미 거대한 러시아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늘렸습니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은 볼가 강을 따라 시베리아 남서부의 시베리아 칸국입니다. 그래서 16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다민족, 다종교, 대륙간 국가로 변모했습니다.

 

러시아는 코사크 시대인 17세기에 영토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코사크는 해적과 신대륙 개척자와 유사한 군사 공동체로 조직된 전사입니다. 코사크인의 토착은 러시아/루세니아 도시 요새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요새는 볼가 중부에서 랴잔과 툴라까지, 페레아슬라프를 통해 드네프르 강까지 남쪽으로 갑자기 갈라집니다. 이 지역은 다양한 장인에 종사하는 자유인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1648년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폴란드의 사회적, 종교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자포로제코사크에 가입하고 흐멜니츠키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65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우크라이나의 보호를 요청하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서부는 폴란드, 동부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670년부터 1671년까지 스탕카 라진이 이끄는 코사크들은 볼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차르의 군대에게 패배하였습니다. 또한, 동부에서는 코사크들이 주로 모피와 상아를 찾아 러시아의 시베리아 영토를 신속하게 탐사하고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러시아 탐험가들은 시베리아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17세기 중반까지 동시베리아, 추키 반도, 아무르 강, 태평양 연안에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648년에는 페도트 포포프와 세苗 데르니오프가 아시아와 북미 사이의 베링 해협을 처음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참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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