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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시대(Middle Ages)_9

by HI_S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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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국가 권력의 부상

중세 말기에 유럽의 정치 생활은 18세기 말이나 그 이후까지 기관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왕이 외세의 개입 없이 통치할 수 있다는 권리가 널리 인정되어 국가 주권이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세습군주제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이 왕위를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대법원은 왕립 정부의 중심이 되었고, 항소법원의 역할도 했습니다. 왕실 수입만으로 국가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세금이 크게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군사적 이유로 특별세를 걷었지만, 나중에는 세금을 자주 걷기 시작했습니다.

 

효과적인 세금 징수는 동의에 의존했고, 이는 대의제 의회의 역할을 강화하고 국가 행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오랫동안 세속적 영향에서 벗어난 이념을 고수했고, 기독교 세계 전체에 임시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의 군주적 권력은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 교황) 때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과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이탈리아 중부의 대부분과 일부 가톨릭 국가의 통치자와 봉건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는 1016년부터 1091년 사이에 노르만족에게서 빼앗긴 롬바르디아, 비잔티움, 이슬람 통치자들의 영토였고, 로저 2세(1105-54년)는 노르만 공국을 시칠리아 왕국으로 합쳤습니다.

 

1024년에 오트톤이 살리족으로 바뀌었습니다. 살리족은 작은 귀족들을 도와 공작들의 권력을 약화시켰고, 부르고뉴를 점령했습니다. 1125년과 1137년 사이에 살리족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 자리를 내줬습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교황과 계속 싸워 이탈리아 북부 도시와 독일 왕자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1183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5-90년)는 롬바르디아 도시가 지도자를 뽑을 수 있게 했고, 그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1220-1250년)는 왕자들이 자치할 수 있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박식하고 비전통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탈리아를 통치하려다가 왕조를 망쳐버렸습니다. 독일에서는 왕이 없는 기간에 내전이 일어났고, 시칠리아 프레데리크의 유산은 프랑스 앙주 왕자 샤를 1세(1266-1285)가 차지했습니다.

 

내전 기간에 왕자 당선자 일곱 명이 국왕을 뽑는 권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루돌프(Rudolf of Habsburg, 1273-91년)는 빈 자리에서 뽑힌 첫 번째 독일 국왕이었는데,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오스트리아를 주어 합스부르크 왕조가 중앙유럽을 지배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알프스 지역의 세 농촌 사회는 사법 자율성을 지키고 친척을 거부하기 위해 스위스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군주제는 점점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왕들은 노르망디 공작과 강력한 적이 되었고, 정복자 윌리엄(1035-1087년)은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정복했습니다. 앙리 2세(1154-1189년)가 왕이 되자, 상속과 결혼으로 프랑스의 많은 곳을 점령한 해협 횡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에도 첫 앵글로-노르만 영주국을 세웠습니다. 그의 아들 리처드 1세(1189-1299년)는 앙드레뱅 제국을 유지했지만, 그의 형제 요한(1199-1216년)은 프랑스 북부의 땅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1180-1223년)에게 잃었습니다.

 

요한은 노르망디를 되찾으려다 실패했고, 재정적으로 어려워져 1215년에 영국 자유인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하는 대헌장을 내야 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루이 8세(1223-1226년)가 아버지가 정복한 대부분의 땅을 어린 아들들에게 나눠주어 통치하기 쉽게 했습니다.

 

그의 아들 루이 9세(1226-1270년)는 순시관을 두어 왕실 관리들의 행동을 감독하고 지방 행정을 개선했습니다. 파리 왕립법원은 매년 정기적으로 사람들을 재판했습니다.

 

이베리아 기독교 국가들은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되찾으려고 했고, 이 시기를 Reconquista라고 합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몇 번이나 나뉘고 합쳐지다가, 1230년에 기독교 북부는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4개 왕국으로 되었습니다.

 

아라곤은 해군이 강해져서 무슬림이 가진 발레아레스 제도와 이탈리아의 안젤빈스가 가진 시칠리아, 제노바가 가진 사르데냐를 점령했습니다. 이베리아 남부는 1031년에 코르도바 칼리프가 지배하던 이슬람 국가가 타이파스라는 작은 나라들로 쪼개졌습니다.

 

마그레브에서 온 알모라비데와 알모하데라는 두 왕조가 1110년대와 1170년대에 남이베리아를 통치했지만, 그들의 제국은 금방 무너져서 기독교 왕국이 더 넓어지게 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가톨릭 국가들도 노르웨이 왕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북유럽 식민지를 차지했고, 덴마크는 에스토니아의 일부를, 스웨덴은 핀란드를 정복했습니다.

 

키예프 로스는 독립된 공국들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북부의 블라디미르-수즈달은 1169년에 키예프를 약탈한 수즈달군이 강해져서 주요 세력이 되었습니다. 폴란드는 자치공작들로 쪼개졌고, 체코 국왕이 번창하는 실레지아 공국을 더 키웠습니다.

 

헝가리 왕은 크로아티아를 점령했지만, 그 곳의 귀족들의 자유를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달마티아, 보스니아, 유목민 쿠바인 등의 다른 땅과 사람들을 종속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정기적으로만 그랬습니다.

 

쿠만인들은 불가리아인과 플라흐인을 도왔고, 그들의 반비잔티움 반란으로 불가리아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불가리아 서부에서는 세르비아가 독립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1206-27) 때 유라시아 대초원을 통치하며 동부 유럽 국경까지 확장했습니다. 1236년부터 1242년까지 몽골인들은 볼가 불가리아와 러시아 공국을 정복하고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의 넓은 땅을 파괴했습니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칸(1241-1256년)은 볼가 강변의 살레를 수도로 삼고, 몽골 금장 칸국이라는 이름의 칸국을 세웠습니다. 몽골인들은 러시아 공국에게 많은 공물을 받았고, 러시아 왕자들은 몽골 칸의 은혜를 받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으로 양보했습니다.

 

몽골의 압박으로 아나톨리아 셀주크 술탄국은 비잔티움 국경의 오스만 가문의 영주나 다른 작고 공격적인 튀르크 영주들에게 쪼개졌습니다. 몽골 정복 이후 동유럽은 평화로워졌고, 흑해 지역에 새로 생긴 제노바 식민지를 통해 유럽과 중국 사이에 직접 무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극동으로 가는 육로와 해로는 마르코 폴로(1324)가 쓴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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